
ⓒ김도담
산수유, 개나리꽃이 피기 시작하던 봄날이었다. 1년 전, 우리 가족은 아빠의 시한부 선고를 들었다. 병원 의자에 앉아, 백발노인들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나는 결국 아빠의 노년기를 볼 수 없는 건가.' 마음속에서 한동안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몇 달 뒤, 담당 의사는 더 이상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며 간호사를 통해 호스피스 진료 의뢰서를 건넸다. 그때부터 우리는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서울 호스피스 대부분은 누군가 임종해야만 자리가 난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두 달 가까이 기다리는 일이 흔했다.
아빠는 은퇴한 지 두어 달 만에 식도암 4기 환자가 됐다. 20개월 동안 21번의 항암 치료를 견뎌낸 끝에 남은 건 시한부 선고뿐이었다. 급격한 혈압 저하로 응급실에 실려온 후, 의료기기 없이 스스로 병원 문을 나설 수 없게 됐다. 엄마와 암병동 보호자 교대를 하며, 호스피스 전원을 알아봤다. 아빠가 유일하게 바라던 건 산책과, 언제든 가족이 면회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온몸을 휘감은 고통에 비해 그의 정신은 끝까지 또렷했다.

ⓒ김도담
시설이 노후된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가족 면회가 비교적 자유롭고 산책할 수 있는 서울의 한 호스피스 1인실에 자리가 났다. 병원 산책길에는 작은 잔디밭과, 가족이 모여 간단히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벤치가 있었다. 아빠의 식사와 소변량은 매시간 기록됐다. 물 두 모금, 밥 한 숟갈, 빵 한 입, 포도 두 알. 말기 환자인 그가 스스로 씹고 삼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했다. 매일같이 한 입이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았다. 두세 입이 전부였지만 그가 만족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면 더없이 행복하고 고마웠다.
진통제 주입기, 소변줄, 산소통을 휠체어에 옮겨 싣고 하루 두어 번씩 산책에 나섰다. 전원 후 아빠가 스스로 발을 디뎌 휠체어에 오를 수 있었던 날은 일주일 남짓뿐이었다. 의식이 또렷했던 아빠는 마지막까지 가족에게 기저귀를 갈게 하지 않으려 애썼다. 힘들었지만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이동형 변기를 사용했고, 침대에 앉아 매일 양치도 했다. 아침마다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로션을 발라주면 환하게 웃었다.
전원 일주일째, 밤이 되자 갑작스러운 섬망 증상이 찾아왔다. 산소호흡기를 빼거나 내가 잠시 졸기라도 하면 침대 아래로 내려와 밖으로 나가려는 행동을 했다. 암병동 앞자리에서 목격한 섬망 환자와 같이 돌발 행동이 잦아졌다. 어두운 밤과 고요한 병실을 두려워하는 아빠를 위해 나는 불을 켜고 TV를 틀어놓았다. 밤에는 잠들지 않고 그의 곁에서 일을 했다. 침대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다면 전이된 골반뼈가 으스러졌을 것이다.
입원 9일째 되는 날, 아빠가 내게 조용히 물었다. "삶을 끝내고 싶은데, 어찌하면 좋겠냐" 그리고 덧붙였다. "이건 나를 위한 일이 아니야."
계속해서 차오르는 가래로 숨이 차 누워 잠들지 못하고, 앉아서 생활한 지 몇 달째. 아빠의 꽁지뼈는 동그랗게 말려 혹처럼 변했고, 엉덩이에는 욕창이 생겼다.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하는 아빠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아빠의 고통을 이만 끝내드리고 싶어.'
말기 환자로 병실에 누워 약물로 통증 조절을 한 채 죽을 날을 기다린다면. 나를 간호하는 가족들의 고통을 지켜본다면. 나라도 아빠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름답고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아빠와의 20일은 다음 화까지 이어집니다. 그 기억의 길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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